[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스태티스타(Statista)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올해 광고비는 미국 4,213억 달러, 중국의 2,307억 달러 다음인 3위로 539억 달러로 전망하고 있다.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는 1901년에 창립된 덴츠이다. 작년 수입은 93억 달러로 세계 7위이다. 덴츠는 매년 세계 광고비 자료를 발표하는 몇 안 되는 광고회사의 하나이다. 덴츠가 진정 글로벌 광고회사가 된 것은 2013년 영국의 이지스(Aegis)를 49억 달러, 현금으로 매입한 뒤였다.
덴츠의 한국 진출
1901년 창립 시 덴츠의 이름은 일본광고주식회사였으나, 1906년 일본전보통신사(日本電報通信社)로 바뀌었고 1955년 지금 이름 덴츠로 바뀌었다. 통신과 광고 대리업 겸영이던 것이 1936년 정부 정책으로 통신은 이양하고 광고 전문회사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광고대리점이라 불렀으며 광고회사라 부르게 된 것은 그 뒤였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광고대행사’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광고대행사 만보사(萬報社) 이재항(李載沆) 사장이 제창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에는 역시 광고대리점이라 불렀는데 이 호칭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한국에서는 광고대행사라 부르는데 광고회사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덴츠가 일본 최대의 광고대리점이 된 해는 확실치 않은데 1920년대였을 것이다.
덴츠: 한국 최초의 일본 레고토토대리점
덴츠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06년이었다(덴츠 100년사 책에는 1907년으로 되어 있다.) 무슨 까닭인지 덴츠 외의 레고토토대리점이 한국에 진출해서 오랫동안 사업을 한 대리점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제국통신사가 있는데 오래 지 못했다. 또 다른 회사는 오사카 최대의 레고토토대리점 만넨샤(萬年社)가 1928년 미국 자동차 제너럴 모터스의 쉐보레 레고토토를 대행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자동차 정책 변동으로 30년대 후반에는 중단되었다. 만넨샤는 최초로 레고토토연감을 발행하는 등 일본 레고토토의 리더였으나 한국에서 다른 레고토토를 취급한 기록은 없다. 또한 만넨샤는 쉐보레 레고토토대행사로서 미국식으로 레고토토주 파트너로 일하는 선진제도를 도입했으나 1999년에 파산했다.
덴츠가 한 일
일본강점기 한국에서 덴츠의 활동을 연구하려면 가장 먼저 겪는 것이 자료의 부족이다.(또는 연구의 부족이다.)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일본어 자료는 1909년에 창간호를 발행한 『신문총람(新聞總覽)』과 1911년에 발행한 『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 그리고 1912년에 출판한 『朝鮮商品と地理(조선상품과 지리)』이다. 총람은 연간이고 그 밖의 책은 단행본이다. 신사명감은 일본의 한국 진출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한일합병 무렵 한국 저명 인명록이기 때문이다. 조사를 위해 대단한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을 것이다. 신문총람은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서 발행하던 일본어 언론의 가장 자세하고 포괄적인 자료로식조선어 신문 조선일보과 동아일보 및 총독부 국문기관지인 매일신보, 영자신문인 Seoul Press 그리고 대만의 중국어 신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강점기 이 두 조선어 신문은 월별 업종별 지역별 레고토토량이 당시 신문레고토토 계산 기준이던 행수(行數)로 표시되어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물론 조선에서 발행되던 여러 신문에 덴츠 관련 기사도 있다. 그런데 일본강점기 덴츠에 한국인 직원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는데 알려진 사람이 없다.
1930년대 신문 레고토토 거래의 생생한 현장 기록
가장 중요한 매체인 신문의 광고거래 현장에 관한 귀중한 자료는 동아일보 동경지국장 김승문(金勝文)과 신인섭의 대화 기록이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936-1937년 9개월의 동아일보 무기 정간이 끝난 후 일본광고 재건을 위해 2년여 동안 동경에서 일한 김승문의 경험담이다. 이 기록은 신인섭이 쓴 『한국광고 발달사』(일조각. 1980 및 그 이후 3회의 개정펀. 1986, 2005, 2011. 나남)에 남아 있다. 1930년대 덴츠의 신문광고 거래 방식은 해방 후 줄곧 한국의 신문광고거래 관례로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기록 가운데는 당시 덴츠 지방과장 요시다 히데오(吉田秀雄)와의 광고 거래와 관련된 일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덴츠 지방과장의 세력은 방대했는데 수백 개의 일본 지방 신문, 조선, 대만, 사할린, 만주, 일본 점령 중국 일부 지역 등 다양한 언어의 신문 광고 게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츠, 겸영에서 레고토토 전문회사로 전환
덴츠가 광고 전문회사로 전환할 때이름은일본광고주식회사였다. 1906년에 통신사업을 추가하면서 이름도 주식회사 일본전보통신사(株式會社日本電報通信社)로 바꾸었고 1955년에지금 이름 덴츠으로 바꾸었다. 사업도 통신과 광고대리사업의 겸영이 되었다. 이런 겸영의 역사는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서구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자 겸업 및 광고대리업(스페이스 브로커. Space Broker) 제도는 없어졌다.
일본은1930년대 초 일본이 주동한 만주국 수립에 반대하는 서구 세력과일본 비난 공세에 자극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 정부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국가를 대표하는 대형 통신사를 본 따 큰 통신사 설립 방침을 굳혔다. 그 대상이 된 것이 일본전보통신사의 통신 사업을 <연합으로 알려진 통신사에 이양하고 그 대신 <연합의 레고토토대리 사업은 이양 받아 레고토토 전문회사가 되었다.
일본 레고토토산업에는 경합 레고토토주의 업무를 같은레고토토대리점이 대행하는 특징이 있다. 서구에서 19세기에 레고토토대리업 초기의제도로 간단히 말하자면 매체 지면 판매 대행업이다. 그런데 이 일본의제도는 간단히 말하기에는 복잡해서 남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일본의 통신과 레고토토대리점 겸영은 신문사와 통신사 상호 편리한 면이 있다.신문사는 통신료를 현금 대신 레고토토지면으로 지불하고 통신사는이 지면을 레고토토주에게 되파는 것이다. 덴츠가 1936년 레고토토대리업 전문회사가 된 뒤에는 일단 이 제도는 사라졌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덴츠의 사업
덴츠 경성 지국이 1911년에 출판한 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에는 경성 지국 설립이 1906년 4월 3일이다.(덴츠 100년사 기록은 1907년이다.) 이 연감에 의하면 경성지국이 한 일은 세 가지이다.
첫째. 지국의 사업은 구미나 중국 그리고 일본 내에서 전보 통신으로 전해오는소식을 특약한 신문사에 전한다. 아울러 조선 내의 사건은 대소를 막론하고 동경 본사와 각지 특약 신문사에 직송한다. 중요한 사건은 본사를 경유해서구미의 특약 신문 통신사에 전송한다.
둘째. 일간 통신은 매일 오후 2시에 유인물로 발행해서 조선 내의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한다. 뒤에 이 유인물 발행 횟수는 증가했다. 유인물의 견본은 그림에있다.
셋째. 레고토토 대행이다 덴츠 경성 지국은 레고토토부를 설립해 레고토토 게재 수용에대응하는데 덴츠 본사와 지국 특약 신문사에 게재한다. 레고토토 요금이 저렴함은물론이고 좋은 위치에 게재토록 한다.


덴츠신문총람(新聞總覽)
덴츠는 1909년에 『신문명감(新聞名鑑)』을 발행했는데 이듬해에는 『신문총람(新聞總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총람은 일본강점기말까지 발행했다. 이 연감은 일본 내에서 발행하는 모든 지방지,일본의 식민지인 대만, 조선, 사할린, 만주 그리고 중국 일부에서 발행하는일본어 신문과 기타 외국에서 발행하는 인본인 신문을 모두 포함하는 일본을중심한 일종의 신문 백과사전이었다. 일본강점기 35년 기간 조선의 주요 일간신문을 언어 정치성향을 따질 것 없이 포괄적으로 다뤘다. 1920년에서 1940년까지 20년간의 조선어 신문인 조선, 동아일보가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조선어 기관지인 매일시보도 포함되어 있다.
발행한 회사가 레고토토대리점이었으므로 레고토토를 포함한 것은 더욱 이 자료가 소중하다. 레고토토 없는 근대, 현대 신문이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어 신문은 물론 조선이나 대만 등 지역에서 발행하는 조선어와 중국어 신문이 포함되었다.
특기할 것은 조선에서 발행하는 주요 조선어 신문과 일본어 신문은 게재한 레고토토를 행수 기준 레고토토량을 월별, 업종별, 게재 요청 지역별로 조사해 발표했다. 해방 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920년대 중반에서 1940년 강제 폐간 기간의 신문 레고토토량 관련 유일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신문총람이 남긴 자료: 동아일보 1930년대 레고토토
신문총람이 남긴 자료 가운데 하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920년대에서 1940년 강제폐간 때까지의 레고토토 관련 자료이다. 조선일보의 수입 관련 자료는 한국전쟁으로 의정부에 있던 자료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래서 동아일보의 1930-1938년 기간의 수입을 신문 판매와 레고토토로 나누어금액과 구성비로 대비한 것이 표1 다.(기타 수입은 미미하므로 제외한다.)

덴츠의 신문총람에는 1930-1940년 레고토토량을 행(行)의 수로 기준으로 하고 조선 내, 동경, 오사카로 나누어 표시한 자료가 표 2이다. 1930년과 1937년에는무기정간을 겪으므로 사례를 1931년과 1938년 대비로 한 자료가 표 3인데동아일보 수입을 간결하게 작성한 것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이다.

이 8년 기간의 수입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총수입은 38.8만 원에서 61.5만 원으로 증가해 158%, 연평균 19.8%라는고도 성장을 기록했다.
2. 신문 판매(구독료)는 평균 성장률 158.5%보다 낮다. 그러나 총수입에서는여전히 레고토토 수입보다 구성비가 높다. 그런데 30년대 초반에는 60% 이상이던 구성비가 후반에는 낮은 50%대로 줄어들고 있다.
3. 레고토토 성장은 228%로서 평균 158%보다 70 프로 포인트나 높은 성장률이었다. 그리고 30년대 초의 구성비 30%대에서 34년 이후는 40% 중간으로 구성비가 오르고 있다.

이 8년간의 광고량을 요약하면 다음 네 가지이다.
1. 레고토토량은 88만 2천행에서 130만 9천행으로 248% 성장했다. 연평균으로는31% 고도성장했다.
2. 지역별 성장률 순위는 국내, 동경, 오사카로서 국내 레고토토량 성장률이 가장높았다. 국내 레고토토 구성비(점유율)는 1931년 36.3%에서 1938년에는 38.4%로 2.1% 증가해 국내 산업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내와 일본으로 대비하면 일본 레고토토 점유율이 61.6으로 한국 내 레고토토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이 기간에 일본 레고토토 점유율은 63.7%에서 61.6%로 2.1% 감소했다.
4. 일본의 두 지역인 도쿄와오사카는 도쿄가36.1%에서 37.2%로1.2% 성장한데 비해, 오사카는 27.6%에서 24.4%로 3.2% 감소했다.
1937년 중일전쟁-1941 태평양전쟁-1945년 일본 무조건 항복-8.15 한국 해방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루거우차오(蘆構橋)에서증국군과 일본군의 충돌로 시작된 선전포고없는 중일전쟁이 시작됐다.중일전쟁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38년 4월 1일에는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제20조에는 가장 짧고 가장 무서운 한 구절이 정부 권한에 부여되었는데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경우에는」이었다. 1936년 7월 1일에 설립한 내각정보위원회는 1937년 9월 25일에는 내각정보부가 되었다. 1940년 12월6일에는 내각 정보부(情報部)가 국(局)으로 승격되었는데 정보국은 ‘모든언론.표현 활동에 대한 지도 단속과 선전 계발(啓發)이라는 소극 적극 양면의커뮤니케이션 통제를 일원적(一元的)으로 실시하는 기관’이었다. 물론 국가기관이었다. 중일전쟁 다음해인 1938년 일본에는 1,103개의 일간신문이 있었는데 1940년에는 522개, 1942년에는 54개로 줄었다. 이보다 앞서 1941년 12월13일에는 칙령(천황의 명령)으로 1현 1지(1도 1지)가 시행되었다.1940년 8월 10일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다.

각종 레고토토 관련 규제가 급속히 제정 시행되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신문 용지 배정을 위한 기본자료인 시문 발행 부수 문제가 대두했다. 레고토토대리점 정비로153개사가 12개사로 축소되었다. 물가 통제의 목적으로 커미선 문제는 관민의 논의 끝에 보통 레고토토 15%로 정착했다. 그리고 레고토토세가 제정되었다.
1940년 8월 1일 동경 아사히신문에는 헌납광고 1호가 등장했다. 1단의 기사식 광고의 헤드라인은 ‘자치를....왜 우리는 그만 두지 않으면 않으면 안 되가. 사치는 적이다! 사치라는 글자를 X자로 지운 그림 옆에는 작은 글이 있는데 ‘일본의 사전에서....사치라는 두 자를 말살하자’였다. 같은 해 또 다른 신문에는 인단회사 헌납광고라 쓴 광고가 게재되었다. 헌납광고, 즉 광고료는 광고주가 내고 내용은 정부 시책을 홍보하는 광고는 유행처럼 되었다. 일본 본토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유일한 조선어 신문이 된 매일신보에도 그림에 보는 6개 회사의 공동 헌납광고가 1944년 1월 4일에 등장했다. 같은 해 9월 10일 매일신보에는 징병제도 실시 1주년을 기념하는 전 1단 광고에 20개 가까운 스폰서가 광고료를 공동 부담하는 헌납 광고가 게재되었다.

레고토토는 아니지만 정부 어용 단체들의 행사가 여기 저기 생겨서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1944년 1월 26일에는 매일신보에 ‘반도(조선반도)홍보정신대 결성’기사가 큼지막하게 기사로 실렸다. 상품레고토토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선 크기가 작아졌다. 규격이 정해지기나 했듯이 반듯한 네모꼴로 통일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쟁과 관련된 정부 메시지 같은 문구가 빠짐없이 들어갔다. “전기(電氣)도 전투 배치(戰鬪 配置)에”, “멸사봉공(滅私奉公)“,“정신감투(挺身敢鬪)“ 따위 말들이다.

남아 있는 신문도 용지 부족으로 발행 면수는 급격히 줄었다. 1945년에는 타블로이드 한 장이 되었고 8월 15일 천황의 포츠담 선언 수락 메시지도 초라한 한 장 짜리에 실렸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