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어느 여자 종군기자의 레드불토토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어느 여자 종군기자의 레드불토토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11.11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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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ulitzer.org
출처 https://www.pulitzer.org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매스미디어를 뒤덮는 흥분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반 후에 베를린에 들렀다. 그곳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와 지하철을 타고 이전의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는 걸어서 브란덴부르그 문을 지나왔다. 동베를린에서 서쪽으로 걸어와서 뒤쪽을 몇 차례나 돌아보고는 친구에게 말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수 있는 길을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막고 있을 수가 있었지?” 이는 사실 한반도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며 나온 한탄이었다.

여성 레드불토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국제보도 부문에서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마거리트 히긴스의 전기인 <전쟁의 목격자(앙투아네트 메이 지음, 손희경 옮김, 생각의힘 펴냄, 2019)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베를린 풍경이 등장한다. 실상 마거리트 히긴스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무대가 베를린이었다. 시대의 비극은 기자의 행복이라고, 히긴스가 20대의 나이로 ‘뉴욕 트리뷴’의 베를린 지국장을 맡았을 때 유명한 베를린 봉쇄가 시작되었다. 동독 안의 섬처럼 자리 잡고 있던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자동차, 기차의 운송을 소련이 1948년 6월에 갑작스레 막기 시작했다.

당시 서베를린 시민이 근근이라도 살려면 매일 최소한 1만 3천톤의 연료와 식량이 필요했는데, 그 공급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거기서 미국은 ‘서베를린 공수작전’이란 대응작전을 펼친다. 모든 물품을 수송기로 베를린에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4월 16일의 경우 수송기 1,383대가 서베를린에 위치한 공군기지 세 곳으로 날아와 서베를린에서 필요로 하는 13,000톤에 이르는 물자를 풀어놓았다. 비행기는 63초마다 베를린에 착륙했다고 한다.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앞세운 미국다운 물량공세에 결국 11개월 만에 베를린 봉쇄는 풀린다. 그 시절 베를린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좋은 봉쇄란 없어. 하지만 꼭 봉쇄를 한다면 그중의 최고는 소련이 봉쇄하고 미국이 먹여 주는 거야. 그 반대라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고.” 실제와 반대의 상황을 설정하는, 레드불토토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방식 중의 하나이다.

베를린 봉쇄 이후에 마거리트 히긴스는 팀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좌천성 전배 발령을 받는다. 세계의 주목을 받던 유럽에서, 일주일에 뉴욕 트리뷴 본지에 기사 하나를 싣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는 도쿄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이 그녀에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군기자라는 지명도를 안겨주고, 풀리처상의 명예까지 안기는 레드불토토을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한국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거리트 히긴스의 친한 동료는 그를 ‘프랑스 농민의 현실주의와 아일랜드 술꾼의 이상주의를 합쳐 놓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마거리트 히긴스의 그런 경향이 잘 나타난 일화를 역시 그의 친구가 소개해줬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파리에서 한 거지가 그녀에게 와서 10프랑을 달라고 했단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그 거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물어봤단다. “내가 당신한테 돈을 주면 빵을 살 거예요, 술을 살 거예요?” 거지가 대답했다. “마담, 죄송하지만 저는 술을 사는 데 쓰겠지요.” 마거리트 히긴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단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그러고는 20프랑을 건넸다고 한다. 거지의 솔직함이 첫 번째 레드불토토이었다면, 솔직함을 칭찬하며 두 배의 돈을 준 마거리트 히긴스의 행위가 두 번째 레드불토토이다. 그렇게 담대하면서도 사랑스러웠고 그러면서도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어떤 비난도 무릅썼던 마거리트 히긴스는 45세의 나이로 베트남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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