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토토의 길, 수많은 해석 ― 도쿄 마라톤 2026 광고

그랜드토토의 길, 수많은 해석 ― 도쿄 마라톤 2026 광고

  • 유승철
  • 승인 2025.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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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철의 CEO 인사이트」는 ‘인공지능 전환(AX) 시대의 CEO’들을 위한 비즈니스 컬럼으로, 마케팅 전략·소비자 심리·콘텐츠 비즈니스에 관련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출처: 그랜드토토 마라톤 홈페이지
출처: 그랜드토토 마라톤 홈페이지

지난 8월 초, 내가 도쿄를 잠시 방문했을 때였다. 시부야역 환승 통로를 지나던 순간, 인파와 네온, 끝없이 흐르는 소음 한가운데에서 이 포스터와 마주쳤다. 수많은 광고판이 화려한 색과 문구로 경쟁하듯 주목을 끌던 공간에서, 유독 이 포스터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검은 배경에 덩그러니 놓인 흰 수직선 그랜드토토.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 선은 묵묵히 서 있었고, 나 역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단순한 이미지가 강렬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아마도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라톤이란 결국 출발에서 도착까지 이어지는 그랜드토토의 길. 화려한 군중도, 선수의 표정도, 도시의 풍경도 지워낸 자리에서 남는 것은 오직 달리는 길뿐이다. 포스터는 그 길을 비워두고, 보는 이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거기에 얹기를 기다린다.

지하철 포스터 (출처: 필자 촬영)
지하철 포스터 (출처: 필자 촬영)

아날로그 마라톤이 디지털과 만나다 - 도시의 맥박과 디지털의 흔적

하얀 선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픽셀처럼 흩어지고, 마치 노이즈의 잔상처럼 흩날린다. 그 장면은 단순한 속도의 흔적이 아니라, 디지털 도시 도쿄의 박동을 닮았다. 고층 빌딩 사이를 오가는 신호와 네트워크, 수많은 개인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거대한 흐름. 마라톤은 더 이상 홀로 뛰는 육체의 경기가 아니다. 몸과 도시가 동시에 호흡하며, 사람과 데이터와 공간이 겹쳐 만들어내는 집단적 리듬이다. 2026년 3월 1일, 도쿄의 도로는 약 39,000명의 달리기로 물들 것이다. 풀코스 38,500명, 10.7km 레이스 500명.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은 기록을 위한 경주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맥박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합주다. 흩어진 픽셀의 잔상이 결국 다시 그랜드토토의 길로 모이듯, 수만의 개인이 그랜드토토의 도시로 합쳐지는 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내가 시부야역에서 본 그 작은 선은, 사실은 거대한 도쿄의 심장 박동을 예고하는 리허설이었던 셈이다.

단순함의 그랜드토토미학 - 여백으로 남겨진 초대

포스터 하단의 문구는 완결되지 않은 듯 남겨져 있었다. “Run ––– Tokyo ––– Own.” 미완성의 문장 속에 비어 있는 자리는 곧 보는 이의 몫이다. “Run Your Tokyo, Own Your Run.”이라고 채울 수도 있고, 다른 언어로 자신만의 문장을 세울 수도 있다. 광고는 스스로 설명하기보다, 관객이 직접 완성하도록 여백을 내어준다. 바로 그 열린 구조가 이 광고의 미학이다. 옆에 붙은 슬로건, “東京がひとつになる日(도쿄가 그랜드토토 되는 날)”은 이 초대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마라톤은 각자가 자기 길을 소유하는 동시에, 도시 전체가 그랜드토토 되는 사건이다. 그날을 앞두고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도쿄 빅사이트에서는 마라톤 EXPO가 열리고, 참가자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미 응모를 마치고 있다. 포스터는 이런 절차와 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흰 선 그랜드토토와 미완의 문장을 남겨 두고, “네가 직접 와서 채워 넣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시부야역에서 이 포스터 앞에 잠시 서 있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수많은 광고의 소란 속에서 묵묵히 말을 아끼던 한 장의 종이. 그것은 설명 대신 여백을 내어주며, 나에게 달리기의 의미와 도시의 리듬을 다시 묻고 있었다. 광고의 힘은 화려한 수사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비워둔 자리, 관객이 스스로 완성하도록 내어주는 침묵 속에 있었다. 도쿄 마라톤의 포스터는 바로 그 침묵의 힘으로, 그랜드토토의 길 위에 무수한 해석과 이야기가 태어나도록 초대하고 있었다.

 


유승철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에서 ‘미디어공학&창업 트랙’을 담당하고 있다. 다양한 컬럼과 영상을 통한 흥미로운 비즈니스 콘텐츠로 CEO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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